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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2

잡담의 즐거움 2007.04.08 15:12

윤대녕의 '은항아리 안'은 온갖 살아있는 것들로 가득하다. 그곳에는 얼음장 아래를 헤엄치는 잉어가 있고, 빈 수레를 끄는 염소, 부리로 모이를 뒤지는 닭, 빈틈없이 날아드는 하루살이 떼가 있다. 또 환한 단풍과 속이 꽉 여문 배추, 햇빛에 젖은 거미줄이 있다. 이 아늑하고 아름다운 은항아리 계곡에 한 여인이 찾아온다.

여인은 그믐의 몸이다. 더 이상 차오를 수 없었던 보름달이 제 한 구석을 허물기 시작해 바야흐로 그믐이 되었다. 여인은 피로하다. 하지만 여인은 남자를 위해 생채와 두부조림과 멸치볶음과 김과 콩나물국과 된장찌개를 요리한다. 그리고 남자는 여인이 시키는 대로 콩나물 대가리의 껍질을 벗겨 내고, 두부와 호박 따위를 사러 채소 가게에 다녀온다. 그 사이사이 여인의 요리를 참견한다. 남자는 한때 캄캄한 방에 혼자 앉아 솥바닥을 긁어 밥을 먹던 때가 있었다고 한다. 그러던 때 그는 사막으로, 또 세상의 끝으로 정처 없이 떠나야만 했는데 남자는 이제 여인으로 인해 떠나지 않는 법을 배우려 한다. 둘은 서로를 사랑하고 있다.

그런데 둘의 사랑엔 그리 많은 시간이 허락되지 않는다. 여인은 떠나야 한다. 아침 8시부터 밤 8시까지 하루의 딱 반만큼 그들은 사랑을 나눌 수 있다. 여인은 묻는다. 다만 조금 긴 하루를 살다 가는 우리는 왜 하루의 반나절도 사랑하는 사람의 옆에 있을 수 없을까요. 여인이 떠나갈 때 하늘의 달은 사라지고, 차창 가에 앉아 있는 여인의 옆얼굴은 따박따박 조금씩 깎여 나간다. 이윽고 항아리 안에 숨죽이고 있던 낮의 짐승들이 하나둘 밖으로 기어 나가고, 은항아리 안엔 명주빛 거미줄만 남는다. 텅 빈다.

올해(2002년) 76세를 맞이했을 하경 씨는 이 텅 빈 은항아리의 슬픔을 알고 있을 것 같다. 그는 2000년 8월 15일, 50년 전 헤어진 남쪽의 아내를 만나기 위해 평양에서 서울로 왔었다. 함께 북에서 건너온 김희영(74) 씨와 리복연(75) 씨가 각기 자신들의 아내를 만날 때 하경 씨는 눈물을 삼켜야 했다. 하경 씨의 아내 김옥진(80) 씨가 재혼에 대한 죄책감으로 상봉장에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둘째 날, 아내 김옥진 씨가 겨우 용기를 내 상봉장을 찾았지만 이번에는 인원제한에 걸려 하경 씨는 김옥진 씨를 볼 수 없었다. 마지막 날, 마침내 김옥진 씨를 만났을 때 하경 씨는 울먹이며 말한다. 마누라, 왜 이제야 온 거야. 미안해서 그랬지요, 이제 왔잖아요. 늦게라도 와주니 고마워. ……. 미안해, 미안해. 이날, 하경 씨와 김옥진 씨가 함께한 시간은 1시간 30분이었다. 다만 조금 긴 하루를 살고 있을 뿐인 이 둘은 하루의 반의반의 반나절도 사랑하는 이의 옆에 있을 수가 없었다.

하경 씨가 윤대녕의 '은항아리 안에' 들어온다면, 그는 아마 '낫을 든 노인'의 역할을 맡았을 것이다. 은항아리 안의 이 노인은 한 손에 낫을 들고, 꼼짝도 않고 서서 멀리 저수지를 바라보고 있다. 노인은 은항아리의 남자와 여인이 다가가도 그 자세 그대로 미동도 하지 않는다. 노인은 상실한 자가 분명하다. 그는 옛적 어느 시절 사랑을 잃었거나 꿈을 잃었거나 삶의 중요한 의미를 상실했을 것이다. 그리고 간신히 낫을 드는 일상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어느 날 문득 상실한 것들의 환영을 보았을 것이다. 삶은 바로 거기서 정지했을 것이다.

단언컨대, 사랑하는 이들을 굳이 갈라놓아야만 하는 이념은 위선이다. 자유를 참칭하는 자들의 자유, 평등을 참칭하는 자들의 평등은 이 땅의 '낫을 든 노인'들을 결코 위로할 수 없다. 배고픈 자에게 필요한 것이 그저 밥이듯 이미 그믐의 몸인 '낫을 든 노인'들에겐 이념도, 체제도, 국가도 아닌 사랑하는 그 혹은 그녀가 필요할 뿐이다. 이 절실한 요구 위에 다시 또 거창한 허위가 올라설 때 한반도라는 은항아리엔 필경 캄캄한 밤이 찾아올 것이다. 하늘의 달이 사라지고, 은항아리 안의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꾸물꾸물 줄지어 기어 나가고, 하루살이 떼까지 죄 밤하늘로 날아가고, 오직 거미줄만 남을 것이다. 이슬에 촉촉이 젖은 거미줄만 홀로 은항아리의 밤을 지새울 것이다. 고준성(2002.4.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