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LOG ARTICLE 낯설게 하기 | 3 ARTICLE FOUND

  1. 2007.03.11 놀람 없는 납득 (1)
  2. 2007.03.02 길, 그리고 광야 (4)
  3. 2007.02.27 식당에 딸린 방 한 칸 (6)

B아파트 103동 801호에는 나와 내 가족이 살고 있다. 우리가 주인은 아니다. 주인은 K시 C아파트에 살고 있는 이모 씨다. 하지만 이모 씨도 아파트가 발을 딛고 있는 땅을 온전히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B아파트 단지가 차지하고 있는 총 19873.5㎡의 땅 중 그의 소유분은 198,735,000분의 358,437일 뿐이다. 그는 아파트 단지 내 다른 호를 소유하고 있는 김모 씨, 박모 씨, 최모 씨 등과 함께 어떤 뚜렷한 구획 없이 땅을 공동소유하고 있는 셈이다. 그 공동소유의 땅 위에 이모 씨의 집 B아파트 103동 801호는 새둥지처럼 떠 있다. 그리고 나와 내 가족은 그 둥지를 빌려 살며 하루하루 짹짹거리고 있다.

한데 생각해보니 신기하다. 땅에 주인이 있다니. 돈으로 땅을 살 수 있다니. 아파트야 인공의 산물이니 그렇다 해도 땅은 애초 누구의 산물이었기에 돈으로 사고팔 수 있었던 걸까. 땅은, 땅 위의 나무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궁금하지만 물을 수 없다. 무식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당연한 일을 묻는 것은 어린아이들만의 특권이지 서른 살 먹은 어른이 할 짓이 아니다. 어른의 할 일은 외려 아이들을 납득시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돈으로 땅을 사고 팔 수 있는 이유를 가장 쉽고 명료하게 설명하는 일인데 그게 어렵다면 아이들의 관심을 다른 더 ‘교육적인’ 곳으로 돌리는 것도 좋다. 바쁜 아이들이 그런 망상이나 하는 것은 소모적이며, 그들의 아름다운 자본주의적 미래를 위해서도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

이렇듯 특별한 배려 속에서 아이들은 자라난다. 아이들은 모든 인식발달의 과정에서 놀람의 단계를 건너뛴 채 납득의 단계에 안착한다. 아이들은 돈으로 땅을 사고판다는 사실, 세상에 공짜는 공기와 바람과 햇빛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놀랍다고 여기는 대신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2001년 11월, 19세의 청소년들이 우는 배경에도 바로 이것이 있다. 이미 놀람이라는 기능이 퇴화한 이들 대부분은 세상의 모든 19세들이 한날한시에 똑같은 시험을 치르고 그 결과에 따라 일등부터 꼴등까지 줄을 서게 된다는 놀라운 사실에 별반 놀라지 않았었다. 단지 조금 불평했을 뿐 이들의 관심은 도리어 수능이라는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 그리하여 훗날 어른이 되었을 때 더 많은 땅을 살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들이 어려운 수능에 울고불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 놀람 없이 납득했고 온몸을 던져 그것과 하나가 됐던 이들에게 어려운 수능은 분명 실존의 위기였을 테니 말이다.

물론 이들을 길러낸 어른들의 세상은 더 참담하다. 그리고 그들의 놀람 없는 납득은 그 파급효과가 더욱 광범위하고 파괴적이다. 가령 그들은 죽음에 대한 죽음의 보복에 대해 전혀 놀라지 않는다. 당연하다 생각한다. 따라서 단지 암기력이 좀 뛰어날 뿐인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죽음을 언도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져도 놀라지 않는다. 피해자의 억울함, 그리고 법철학 운운하며 납득한다. 여기서 죽여도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상식은 통하지 않는다. 무식한 소리일 뿐이다. 그러니 더욱 거침없이 놀람 없는 납득의 파급효과는 계속된다. 때로는 죽음 없이도 죽음이 선고된다. 이유는 ‘죄수’가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저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때로는 테러에 전쟁으로 응답한다. 전쟁은 테러와 다른 고귀한 것인 줄 안다. 전쟁이 ‘정치의 연장’이라면, 테러도 ‘정치의 연장’이다. 아니라면 둘 다 아니며, 전쟁은 그저 대규모의 테러일 뿐이다. 놀람 없이 납득했던 이들은 결코 이 상식을 인정하지 않는다.

B아파트 103동 801호. 막 두 돌을 넘긴 내 아이는 잠들어 있다. 나는 저 아이의 성장이 두렵다. 미래의 어느 날 아이가 놀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안타깝고, 나중에 다시 그것을 당연하다 여길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답답하다. 그리고 혹시 놀람, 납득의 순이 아닌 납득, 놀람의 순으로 세상을 인식하거나 납득, 놀람의 순에서 끝끝내 납득에 머무를 경우를 생각하면 마음이 더욱 답답하다. 차라리 나는 이쯤에서 포기해야 하는 걸까. 저 아이를 놀라게 놔두는 것은 정녕 아이의 미래를 망치는 것일까. 상념은 끝이 없고, 밤은 적막하다. 아파트의 불은 죄다 꺼져있다. 고준성(2001.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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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태의 논어 해석은 차분하지만 도발적이다. 그것은 그가 오랜 세월 동안 공자 위에 내려앉아 있던 모든 공자가 아닌 것들을 벗겨내고 있기 때문이다. 긴 시간과 그 긴 시간이 만든 아득한 거리를 이수태는 가볍게 뚫고 지나가는 것이다.

위정(爲政)에 나오는 단편 ‘子貢問君子. 子曰; 先行其言, 而後從之’에 대한 이수태의 해석은 날것 그대로의 공자를 독해해내는 그의 차별성을 잘 보여준다. 이 단편은 일반적으로 ‘먼저 행하고 나서 그 다음에 그에 관해 말해야 한다’, 즉 ‘말보다 실천이 먼저여야 한다’ 정도의 평범한 의미로 해석되어왔다. 그러나 이 해석은 ‘從之’의 의미를 얼버무리고 있다. 또한 공자와 그의 제자 자공(子貢)에 대한 깊은 이해를 결여하고 있다.

이 단편에 정확히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수태가 강조하듯, 공자의 모든 말이 대화하는 상대방의 상태와 철저히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말하자면 공자의 말은 상대방에 대한 대응이며 처방이다. 이 단편에서도 공자는 그의 제자 자공에 대해 대응하고 처방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공자는 무엇에든 쉽게 감탄하고 무엇이든 쉽게 경배하는 자공에게 ‘군자는 먼저 그 말을 행하고 나서 그 말을 좇아야(추종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從之’의 의미(그것을 좇다)는 그저 단순하고 명쾌하다.

따라서 위정(爲政)의 이 단편 ‘子貢問君子. 子曰; 先行其言, 而後從之(군자는 먼저 그 말을 행하고 나서 그 말을 좇아야 한다)’는 말과 실천의 문제에 관한 공자의 권유라기보다 이데올로기든 종교든 진리라 불리는 그 무엇이 하나의 도그마가 되어가는 과정에 대한 공자의 경고에 해당한다. 공자는 이미 오래 전부터 도그마에 갇힌 인간의 비극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 본성의 밑바닥을 들여다본 공자의 이 성찰은 대체로 옳은 듯 느껴진다. 우선 지성선사(至聖先師)니 문선왕(文宣王)이니 하는 이름으로 그 자신이 신이 되어버린 공자의 처지가 이 성찰의 옳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자신의 신념 하나로 지구 위에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거대한 나라의 정치인들이 이 성찰의 옳음을 증명한다. 쉽게 감탄하고 쉽게 경배하는 자들이 만든 이 도그마와 도그마의 황폐한 세상이 이 성찰의 옳음을 증명한다.

한데, 차분히 생각해보면, 기실 이 도그마의 세상 속에서 싸우고 있는 전사(戰士)들의 착각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들은 다만 ‘길’을 보되 그 ‘길’을 품고 있는 애초의 ‘광야’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길이 처음부터 길이었던 것은 아니라는 단순한 사실을 그들은 놓치고 있는 것이다. 길은 그저 누군가의 발자국 위에 다시 누군가의 발자국이 더해 만들어진 발자국의 모임이라는 사실을, 해서 길은 태생적으로 드넓은 광야 위에 새겨진 한 줄 흉터라는 사실을 그들은 놓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길 속에 갇혀 광야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수태가 공자를 만나고 공자를 읽는 방식은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길이 광야의 작은 일부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 시대의 편협한 전사들에게 이수태의 공자 독법은 유익하다. 비록 그가 공자라는 광야를 넘어서는 또 다른 광야를 인식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는 어쨌든 공자라는 광야에 2천5백 년 동안 새겨진 완강한 길 위에서 자유롭다. 맹자도, 주자도, 다산도 그를 구속하지 못한다. 그는 공자라는 광야 위에 새겨진 그 무수한 길들, 즉 공자에 대한 기존의 모든 해석들을 배반할 준비가 되어있다.

나는 이수태의 이런 도발이 이 시대의 새로운 보편으로 자리 잡기를 바란다. 모든 보편은 폭력적이지만, 이 경우만은 예외다. 이 보편은 세상의 모든 보편들을 의심하는 보편이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보편은 어떠한 길 속에도 갇혀있기를 거부하는 보편으로, 우리로 하여금 길을 벗어나 광야를 달릴 수 있게 하는 보편이다. 길을 벗어나 광야를 달릴 수 있게 하듯 이 보편은 언젠가 다시 광야를 넘어서는 그 무엇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도그마에 사로잡힌 편협한 전사가 되진 않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그래서인지 나는 의심 많은 자들, 그리하여 자기 자신마저 신뢰하지 못하는 가엾은 자들을 외려 신뢰한다. 그들이 사용하는 ‘혹시’, ‘행여’, ‘아마’ 등등 모든 주저주저하는 말들을 나는 사랑한다. 이 사람들과 그들이 사용하는 이 말 속에는 ‘먼저 그 말을 행하고 나서 그 말을 좇아야 한다(先行其言, 而後從之)’는 공자의 깊은 가르침이 담겨 있다. ‘그 말을 좇기 전에 그 말을 행해’ 가르침과 삶의 일체화를 시도하는 그들은 이 작업의 큰 어려움 앞에서 늘 주저주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기에, 쉽게 감탄하고 쉽게 경배해 온갖 확신으로 가득한 이들보다 더 가치 있다. 그들은 심지어 더 도발적이다. 세상은 아마도 이들에 의해 조금씩 바뀌어갈 것이다. 고준성(2003.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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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중식의 ‘식당에 딸린 방 한 칸’을 읽을 때 나의 내면은 시와 더불어 흔들린다. 마치 두 개의 소리굽쇠가 만나 서로를 흔들듯 시는 나를 흔들고, 나는 시를 흔든다. 말하자면 시와 나는 공명(共鳴)한다.

그렇게 공명하며, 나는 시인의 세계를 만난다. ‘식당에 딸린 방 한 칸’에 그려진 시인의 세계는 어둡고 쓸쓸하다. 그곳엔 초라한 식당과 붉은 유곽 따위가 있을 뿐이다. 식욕과 성욕에 허기진 사내들이 그 식당과 유곽에 드나들고, 이런저런 노동에 지친 여인들이 그들을 맞이한다. 시인은, 그리고 나는 세상의 끝에 대해, 끝까지 간 의지와 끝까지 간 삶과 그 삶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한다. 아무래도 사방이 막다른 골목이다.

그러나 막다른 골목에 갇혀있기는 시인의 삶도 마찬가지다. 시인과 시인의 가족은 ‘식당에 딸린 방 한 칸’에 살고 있다. 때문에 그들은 아침녘 밥 손님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제각기 직장으로 공원으로 술집으로 탈출하듯 뿔뿔이 흩어져야만 한다. 뚜렷이 갈 곳이 없는, 좀 거칠게 말해, 대학씩이나 나와 놀고먹는 시인은 동시 상영관 두 군데를 죽치고 귀가한다. 시간이 아프게 흐르고, 시인은 마주선 삶에 대해 점점 주눅이 들어간다. 비슷한 삶을 겪어내고 있는 시인의 여동생들 ― 아버지와 오빠의 등 뒤에서 스타킹을 걷어 올리고, 이불 속에서 뒤척이며 속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시인의 여동생들은 하릴없이 눈물이 많아진다.

고백하건대, 나는 이런 종류의 삶을 알고 있다. 나와 나의 가족은 오랜 시간 ‘방 한 칸’에서 살았다. 때로 그 ‘방 한 칸’은 건물 주차장을 개조한 과일가게의 곁방이었고, 때로 열 평이 채 안 되는 슈퍼마켓의 다락방이었다. 우리는 생쥐가 구멍을 드나들듯 과일가게의 곁방을 드나들었고, 다람쥐가 나무를 타듯 슈퍼마켓의 다락방을 오르내렸다. 방은 둘 다 좁고 어두웠다. 특히 슈퍼마켓의 다락방은 천장마저 낮았다. 우리는 뒤뚱뒤뚱한 오리걸음으로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느리고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한데 이런 느리고 조심스러운 ‘방 한 칸’의 삶엔 어느 날 불쑥 틈입해 들어오는 그 무엇이 있게 마련이다. ‘식당에 딸린 방 한 칸’의 경우 그것은 쥐 한 마리였다. 쥐는, 보름 전쯤 시인의 가족이 모두 잠들어 있을 때, 식구들의 가슴 위를 돌아다녔다. 식구들이 모두 깼고, 쥐를 잡기 위해 뛰었다. 장롱을 들어내고, 벽지를 찢어발겼다. 막내 여동생은 밖에 나가 혼자 울다 들어왔다. 울며, 시인의 여동생은 무덤덤한 일상이 되어버렸던 가난을 재확인했을 것이다. 가난은 이렇듯 가난한 자에게 그들의 가난을 알릴 때 결코 중언부언하지 않는다. 송곳처럼 단번에 가난한 자의 가슴을 찌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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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시집을 덮고, 나는 문득 궁금해진다. 나 역시 예외가 아니었던 이 ‘방 한 칸’의 삶들, 이 가난의 풍경들은 모두 어디로 간 것일까. 정말 ‘발전’과 더불어 깨끗이 사라진 것일까.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지금 뭔가 숨기고 있다. 우리는 비추어야 할 것을 비추지 않고, 돌보아야 할 것을 돌보지 않으며 함께 어디론가 달려가고 있다. 그 모습은 흡사 아득한 저 옛날 동족을 잡아먹던 식인종들의 모습처럼 무모하고 어리석게 느껴진다.

하여 나는 귀양 떠나는 시인의 심정을 이해한다. ‘식당에 딸린 방 한 칸’의 시인은 마침내 스스로 귀양을 떠난다. 막다른 골목 담을 넘어 넘고 넘어 멀리, 한없이 멀리 떠난다. 더 이상 비추어지지 않고, 돌보아지지 않는 자의 마지막 선택일 것이다. 그러나 뛰는 사람보다 더딘 기차를 타고, 길 끝이 무덤인 철로를 달려 시인이 가게 될 곳은 어디인가. 시인은 서해를 넘어, 중국을 넘어, 인도를 넘어, 유럽과 태평양을 넘어, 다시 속초로, 다시 세상의 끝으로, 다시 세상의 끝에 있는 ‘식당에 딸린 방 한 칸’으로 돌아온다. 시인이 무수히 떠났으되 결국은 돌아오게 된 그곳, 눈물겨운 그곳으로.

나는, 눈물마저 얼어버린 이 계절에, 당신에게 김중식의 시를 권한다. ‘식당에 딸린 방 한 칸’이다. 고준성(2002.11.2)

*

식당에 딸린 방 한 칸 / 김중식

밤늦게 귀가할 때마다 나는 세상의 끝에 대해
끝까지 간 의지와 끝까지 간 삶과 그 삶의
사람들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귀가할 때마다
하루 열여섯 시간의 노동을 하는 어머니의 육체와
동시 상영관 두 군데를 죽치고 돌아온 내 피로의
끝을 보게 된다 돈 한푼 없어 대낮에 귀가할 때면
큰길이 뚫려 있어도 사방이 막다른 골목이다

옐로우 하우스 33호 붉은 벽돌 건물이 바로 집 앞인데
거기보다도 우리집이 더 끝이라는 생각이 든다
거기로 들어가는 사내들보다 우리집으로 들어가는 사내들이
더 허기져 보이고 거기에 진열된 여자들보다 우리집의
여자들이 더 지친 표정을 짓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어머니 대신 내가 영계백숙 음식 배달을 나갔을 때
나 보고는 나보다도 수줍음 타는 아가씨는 명순氏
紅燈 유리房 속에 한복 입고 앉은 모습은 마네킹 같고
불란서 인형 같아서 내 색시 해도 괜찮겠다 싶더니만
반바지 입고 소풍 갈 때 보니까 이건 순 어린애에다
쌍꺼풀 수술 자국이 터진 만두 같은 명순氏가 지저귀며
유곽 골목을 나서는 발걸음을 보면 밖에 나가서 연애할 때
우린 食堂에 딸린 房 한 칸에 사는 가난뱅이라고
경쾌하게 말 못 하는 내가 더 끝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가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강원연탄 노조원들이다
내가 말을 걸어본 지 몇 년째 되는 우리 아버지에게
아버님이라 부르고 용돈 탈 때만 말을 거는 어머니에게
어머님이라 부르는 놈들은 나보다도 우리 가정에 대해
가계에 대해 소상히 알고 있다 하루는 놈들이, 일부러
날 보고는 뒤돌아서서 내게 들리는 목소리로, 일부러
대학씩이나 나온 녀석이 놀구 먹구 있다고, 기생충
버러지 같은 놈이라고 상처를 준 적이 있는, 잔인한 놈들
지네들 공장에서 날아오는 연탄 가루 때문에 우리집 빨래가
햇빛 한번 못 쬐고 방구석 선풍기 바람에 말려진다는 걸
모르고, 놀구 먹기 때문에 내 살이 바짝바짝 마른다는 걸
모르고 하는 소리라고 내심 투덜거렸지만 할 말은
어떤 식으로든 다 하고 싸울 일은 투쟁해서 쟁취하는
그들에 비하면 그저 세상에 주눅들어 굽은 어깨
세상에 대한 욕을 독백으로 처리하는 내가 더 끝
절정은 아니고 없는 敵을 만들어 槍을 들고 달겨들어야만
긴장이 유지되는 내가 더 고단한 삶의 끝에 있다는 생각

집으로 돌아서는 길목은 쓰레기 하치장이어서 여자를
만나고 귀가하는 날이면 그 길이 여동생의 연애를
얼마나 짜증나게 했는지, 집을 바래다주겠다는 연인의
호의를 어떻게 거절했는지, 그래서 그 친구와 어떻게
멀어지게 되었는지 생각하게 된다 눈물을 꾹 참으며
아버지와 오빠의 등뒤에서 스타킹을 걷어올려야 하고
이불 속에서 뒤척이며 속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여동생들을
생각하게 된다 보름 전쯤 식구들 가슴 위로 쥐가 돌아다녔고
모두 깨어 밤새도록 장롱을 들어내고 벽지를 찢어발기며
쥐를 잡을 때 밖에 나가서 울고 들어온 막내의 울분에 대해
울음으로써 세상을 견뎌내고야 마는 여자들의 인내에 대해
단칸방에 살면서 근친상간 한번 없는 安東金哥의 저력에 대해
아침녘 밥손님들이 들이닥치기 전에 제각기 직장으로
公園으로 술집으로 뿔뿔이 흩어지는 탈출의 나날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귀가할 때 혹 知人이라도 방문해 있으면
난 막다른 골목 담을 넘어 넘고넘어 멀리까지 귀양 떠난다

큰 도로로 나가면 철로가 있고 내가 사랑하는 기차가
있다 가끔씩 그 철로의 끝에서 다른 끝까지 처연하게
걸어다니는데 철로의 양끝은 흙 속에 묻혀 있다 길의
무덤을 나는 사랑한다 항구에서 창고까지만 이어진
짧은 길의 운명을 나는 사랑하며 화물 트럭과 맞부딪치면
여자처럼 드러눕는 기관차를 나는 사랑하는 것이며
뛰는 사람보다 더디게 걷는 기차를 나는 사랑한다
나를 닮아 있거나 내가 닮아 있는 힘 약한 사물을 나는
사랑한다 철로의 무덤 너머엔 사랑하는 西海가 있고
더 멀리 가면 中國이 있고 더더 멀리 가면 印度와
유럽과 태평양과 속초가 있어 더더더 멀리 가면
우리집으로 돌아오게 된다 세상의 끝에 있는 집
내가 무수히 떠났으되 결국은 돌아오게 된, 눈물겨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