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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3.02 길, 그리고 광야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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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태의 논어 해석은 차분하지만 도발적이다. 그것은 그가 오랜 세월 동안 공자 위에 내려앉아 있던 모든 공자가 아닌 것들을 벗겨내고 있기 때문이다. 긴 시간과 그 긴 시간이 만든 아득한 거리를 이수태는 가볍게 뚫고 지나가는 것이다.

위정(爲政)에 나오는 단편 ‘子貢問君子. 子曰; 先行其言, 而後從之’에 대한 이수태의 해석은 날것 그대로의 공자를 독해해내는 그의 차별성을 잘 보여준다. 이 단편은 일반적으로 ‘먼저 행하고 나서 그 다음에 그에 관해 말해야 한다’, 즉 ‘말보다 실천이 먼저여야 한다’ 정도의 평범한 의미로 해석되어왔다. 그러나 이 해석은 ‘從之’의 의미를 얼버무리고 있다. 또한 공자와 그의 제자 자공(子貢)에 대한 깊은 이해를 결여하고 있다.

이 단편에 정확히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수태가 강조하듯, 공자의 모든 말이 대화하는 상대방의 상태와 철저히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말하자면 공자의 말은 상대방에 대한 대응이며 처방이다. 이 단편에서도 공자는 그의 제자 자공에 대해 대응하고 처방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여, 공자는 무엇에든 쉽게 감탄하고 무엇이든 쉽게 경배하는 자공에게 ‘군자는 먼저 그 말을 행하고 나서 그 말을 좇아야(추종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 ‘從之’의 의미(그것을 좇다)는 그저 단순하고 명쾌하다.

따라서 위정(爲政)의 이 단편 ‘子貢問君子. 子曰; 先行其言, 而後從之(군자는 먼저 그 말을 행하고 나서 그 말을 좇아야 한다)’는 말과 실천의 문제에 관한 공자의 권유라기보다 이데올로기든 종교든 진리라 불리는 그 무엇이 하나의 도그마가 되어가는 과정에 대한 공자의 경고에 해당한다. 공자는 이미 오래 전부터 도그마에 갇힌 인간의 비극을 예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 본성의 밑바닥을 들여다본 공자의 이 성찰은 대체로 옳은 듯 느껴진다. 우선 지성선사(至聖先師)니 문선왕(文宣王)이니 하는 이름으로 그 자신이 신이 되어버린 공자의 처지가 이 성찰의 옳음을 증명한다. 그리고 자신의 신념 하나로 지구 위에 전쟁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한 거대한 나라의 정치인들이 이 성찰의 옳음을 증명한다. 쉽게 감탄하고 쉽게 경배하는 자들이 만든 이 도그마와 도그마의 황폐한 세상이 이 성찰의 옳음을 증명한다.

한데, 차분히 생각해보면, 기실 이 도그마의 세상 속에서 싸우고 있는 전사(戰士)들의 착각은 그리 대단한 것이 아닌 것 같다. 그들은 다만 ‘길’을 보되 그 ‘길’을 품고 있는 애초의 ‘광야’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모든 길이 처음부터 길이었던 것은 아니라는 단순한 사실을 그들은 놓치고 있는 것이다. 길은 그저 누군가의 발자국 위에 다시 누군가의 발자국이 더해 만들어진 발자국의 모임이라는 사실을, 해서 길은 태생적으로 드넓은 광야 위에 새겨진 한 줄 흉터라는 사실을 그들은 놓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길 속에 갇혀 광야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수태가 공자를 만나고 공자를 읽는 방식은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크다. 길이 광야의 작은 일부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 시대의 편협한 전사들에게 이수태의 공자 독법은 유익하다. 비록 그가 공자라는 광야를 넘어서는 또 다른 광야를 인식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지만, 그는 어쨌든 공자라는 광야에 2천5백 년 동안 새겨진 완강한 길 위에서 자유롭다. 맹자도, 주자도, 다산도 그를 구속하지 못한다. 그는 공자라는 광야 위에 새겨진 그 무수한 길들, 즉 공자에 대한 기존의 모든 해석들을 배반할 준비가 되어있다.

나는 이수태의 이런 도발이 이 시대의 새로운 보편으로 자리 잡기를 바란다. 모든 보편은 폭력적이지만, 이 경우만은 예외다. 이 보편은 세상의 모든 보편들을 의심하는 보편이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보편은 어떠한 길 속에도 갇혀있기를 거부하는 보편으로, 우리로 하여금 길을 벗어나 광야를 달릴 수 있게 하는 보편이다. 길을 벗어나 광야를 달릴 수 있게 하듯 이 보편은 언젠가 다시 광야를 넘어서는 그 무엇으로 우리를 인도할 것이다. 우리는 더 이상 도그마에 사로잡힌 편협한 전사가 되진 않을 것이다.

여담이지만, 그래서인지 나는 의심 많은 자들, 그리하여 자기 자신마저 신뢰하지 못하는 가엾은 자들을 외려 신뢰한다. 그들이 사용하는 ‘혹시’, ‘행여’, ‘아마’ 등등 모든 주저주저하는 말들을 나는 사랑한다. 이 사람들과 그들이 사용하는 이 말 속에는 ‘먼저 그 말을 행하고 나서 그 말을 좇아야 한다(先行其言, 而後從之)’는 공자의 깊은 가르침이 담겨 있다. ‘그 말을 좇기 전에 그 말을 행해’ 가르침과 삶의 일체화를 시도하는 그들은 이 작업의 큰 어려움 앞에서 늘 주저주저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은 그렇기에, 쉽게 감탄하고 쉽게 경배해 온갖 확신으로 가득한 이들보다 더 가치 있다. 그들은 심지어 더 도발적이다. 세상은 아마도 이들에 의해 조금씩 바뀌어갈 것이다. 고준성(2003.3.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