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아파트 103동 801호에는 나와 내 가족이 살고 있다. 우리가 주인은 아니다. 주인은 K시 C아파트에 살고 있는 이모 씨다. 하지만 이모 씨도 아파트가 발을 딛고 있는 땅을 온전히 소유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B아파트 단지가 차지하고 있는 총 19873.5㎡의 땅 중 그의 소유분은 198,735,000분의 358,437일 뿐이다. 그는 아파트 단지 내 다른 호를 소유하고 있는 김모 씨, 박모 씨, 최모 씨 등과 함께 어떤 뚜렷한 구획 없이 땅을 공동소유하고 있는 셈이다. 그 공동소유의 땅 위에 이모 씨의 집 B아파트 103동 801호는 새둥지처럼 떠 있다. 그리고 나와 내 가족은 그 둥지를 빌려 살며 하루하루 짹짹거리고 있다.

한데 생각해보니 신기하다. 땅에 주인이 있다니. 돈으로 땅을 살 수 있다니. 아파트야 인공의 산물이니 그렇다 해도 땅은 애초 누구의 산물이었기에 돈으로 사고팔 수 있었던 걸까. 땅은, 땅 위의 나무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을까. 궁금하지만 물을 수 없다. 무식한 질문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누구도 의심하지 않는 당연한 일을 묻는 것은 어린아이들만의 특권이지 서른 살 먹은 어른이 할 짓이 아니다. 어른의 할 일은 외려 아이들을 납득시키는 것이다. 그러니까 돈으로 땅을 사고 팔 수 있는 이유를 가장 쉽고 명료하게 설명하는 일인데 그게 어렵다면 아이들의 관심을 다른 더 ‘교육적인’ 곳으로 돌리는 것도 좋다. 바쁜 아이들이 그런 망상이나 하는 것은 소모적이며, 그들의 아름다운 자본주의적 미래를 위해서도 별로 바람직하지 않다.

이렇듯 특별한 배려 속에서 아이들은 자라난다. 아이들은 모든 인식발달의 과정에서 놀람의 단계를 건너뛴 채 납득의 단계에 안착한다. 아이들은 돈으로 땅을 사고판다는 사실, 세상에 공짜는 공기와 바람과 햇빛밖에는 없다는 사실을 놀랍다고 여기는 대신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2001년 11월, 19세의 청소년들이 우는 배경에도 바로 이것이 있다. 이미 놀람이라는 기능이 퇴화한 이들 대부분은 세상의 모든 19세들이 한날한시에 똑같은 시험을 치르고 그 결과에 따라 일등부터 꼴등까지 줄을 서게 된다는 놀라운 사실에 별반 놀라지 않았었다. 단지 조금 불평했을 뿐 이들의 관심은 도리어 수능이라는 경쟁에서 승리하는 것, 그리하여 훗날 어른이 되었을 때 더 많은 땅을 살 수 있는 기반을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니 이들이 어려운 수능에 울고불고 하는 것은 당연하다. 놀람 없이 납득했고 온몸을 던져 그것과 하나가 됐던 이들에게 어려운 수능은 분명 실존의 위기였을 테니 말이다.

물론 이들을 길러낸 어른들의 세상은 더 참담하다. 그리고 그들의 놀람 없는 납득은 그 파급효과가 더욱 광범위하고 파괴적이다. 가령 그들은 죽음에 대한 죽음의 보복에 대해 전혀 놀라지 않는다. 당연하다 생각한다. 따라서 단지 암기력이 좀 뛰어날 뿐인 한 인간이 다른 인간에게 죽음을 언도하는 놀라운 일이 벌어져도 놀라지 않는다. 피해자의 억울함, 그리고 법철학 운운하며 납득한다. 여기서 죽여도 죽은 자는 돌아오지 않는다는 상식은 통하지 않는다. 무식한 소리일 뿐이다. 그러니 더욱 거침없이 놀람 없는 납득의 파급효과는 계속된다. 때로는 죽음 없이도 죽음이 선고된다. 이유는 ‘죄수’가 ‘이렇게’ 생각하지 않고, ‘저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때로는 테러에 전쟁으로 응답한다. 전쟁은 테러와 다른 고귀한 것인 줄 안다. 전쟁이 ‘정치의 연장’이라면, 테러도 ‘정치의 연장’이다. 아니라면 둘 다 아니며, 전쟁은 그저 대규모의 테러일 뿐이다. 놀람 없이 납득했던 이들은 결코 이 상식을 인정하지 않는다.

B아파트 103동 801호. 막 두 돌을 넘긴 내 아이는 잠들어 있다. 나는 저 아이의 성장이 두렵다. 미래의 어느 날 아이가 놀랄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안타깝고, 나중에 다시 그것을 당연하다 여길 것을 생각하니 마음이 답답하다. 그리고 혹시 놀람, 납득의 순이 아닌 납득, 놀람의 순으로 세상을 인식하거나 납득, 놀람의 순에서 끝끝내 납득에 머무를 경우를 생각하면 마음이 더욱 답답하다. 차라리 나는 이쯤에서 포기해야 하는 걸까. 저 아이를 놀라게 놔두는 것은 정녕 아이의 미래를 망치는 것일까. 상념은 끝이 없고, 밤은 적막하다. 아파트의 불은 죄다 꺼져있다. 고준성(2001.11.19)